조문희 CHO MOONHEE
Artist Biography
조문희 CHO MOONHEE
Artist Biography
2003년 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2009년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졸업 (신조형전공)
SOLO EXHIBITIONS
2020 반풍경, 송은아트큐브, 서울
2017 빈풍경, 갤러리시작, 서울
2016 멀어지는 풍경, 룬트갤러리, 서울
2016 모노인스톨레이션, 갤러리777, 양주
2015 고양아티스트 365, 아람누리미술관 갤러리누리, 경기
2014 매일의 풍경, 갤러리 도스, 서울
2010 이야기가 없는 화면, 아트센터 보다, 서울
2008 A shape in the scene, 바롬갤러리, 서울
GORUP EXHIBITIONS
2020 화랑미술제<평평-팽팽>, 코엑스, 서울
2019 아트경기, 에스팩토리,경기상상캠퍼스,AK갤러리,국립암센터, 서울,경기
2019 덜어내기 : less is more, 소다미술관, 경기
2019 the shift 새롭게, 봄 갤러리박영, 경기
2019 신소장품전, 성남아트큐브미술관, 경기
2018 ongoing dialogues, 서울예술재단, 서울
2018 유니온아트페어, 에스팩토리, 서울
2018 아트경기, 경기도청, 수원
2018 쇼콘, 오산시립미술관, 오산
외 다수
수상 및 선정
2018 서울예술재단 포트폴리오 박람회 입상
2017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신인공모 우수상 (한국현대판화가협회)
2016 갤러리 정미소 우수포트폴리오 선정
프로젝트 기획
2019 양원리(恙原俚) 프로젝트 : 근심의 근원은 상스럽다.
2018 양원리(樣㥳里)드로잉 : 모양을 헤아려 기록하다.
2017 연천군(筵遷麇) 프로젝트 : 결박하여 옮긴 장소
2017 전곡읍(箋曲邑) 드로잉 : 마을의 굽은 곳을 기록하다.
기금 및 수혜
2017, 2018, 2019 경기문화재단 북부사업단
작품 소장 및 아카이브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한국은행, 인천문화재단, 어린농부(주), 베어크리크, 경기문화재단
초현실적 실감과 침묵의 복화술 : 타운하우스의 감성학
안진국(미술비평)
큰 입을 벌리고 나를 삼키고
나는 즐겁게 죽어간다.
집의 입술은 마르지 않았네
- 이근화의 시 「집은 젖지 않았네」 마지막 구절
“영화 세트를 만들고 있구나.” “그때가 정말 아름다운 것 같다.”(작가와 인터뷰; 이하 인터뷰) 우리는 매일 ‘나를 삼키는’ 집에서 ‘즐겁게 죽어간다.’ 그래서 ‘집의 입술은 마르지 않는다.’ 집이란 도대체 뭘까? 조문희 작가는 메가시티의 외곽에 지어진, 서구적 삶의 꿈을 파는 타운하우스를 빗대어 집의 얼굴을 그린다. 그는 자신의 작업대상인 타운하우스에 관해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영화세트”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라는 긍정적인 반응도 보인다. 이근화가 “나는 즐겁게 죽어간다”(「집은 젖지 않았네」)라고 말했던 것처럼, 조문희에게 타운하우스는 “죽어가는” 곳이기도 하고 “즐거운” 곳이기도 하다. 이율배반적인 이러한 감성은 그가 대상을 조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대상의 결을 탐색하고, 민낯을 마주하면서 쌓인 것이다. 또다시 삶의 무대가 된 곳(타운하우스)을 그가 다시 조형적 무대로 만들어 낸—전시제목이 ‘Restage’이다—그곳, 타운하우스는 싸늘하면서도, 온기가 깃들어 있다.
전이의 내력이 아니라 투시의 강도
조문희는 이번에도 메가시티의 외곽에 존재하는, 실존하지만 초현실적인 공간을 탐색한다. 이전부터 작가는 서울 근교의 신도시나 기획단지의 풍경을 담아 왔다. 타운하우스는 작가가 지금까지 탐색했던 대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다르다. 작가의 작업과정과 시각적 조형성을 중심에 두었던 ‘빈풍경’과 ‘반풍경’은—‘빈풍경’은 2017년, ‘반풍경’은2020년 개인전 제목이다—물리적으로 현실공간의 중간에 있는 풍경으로, 생경한 느낌을 줌으로써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서 느끼는 불안(uncanny)을 경험하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각적 조형성보다는 대상이 지닌 정서적 형상을 작업으로 끌어낸다. 창문이 없거나 몇 개 되지 않아 좀처럼 실내를 드러내지 않는 저채도의 건물, 잿빛하늘, 회색빛이 감도는 전체분위기, 그 와중에 몇개되지 않는 창문을 통해 따뜻하고 풍요롭게 퍼져나가는 오렌지빛 실내불빛, 그리고 잿빛 하늘에서 왔을것이라 상상할 수 없는 옅은 주황빛 햇살. 그렇다고 시각적 조형성을 폐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시각적 조형성을 중요시한다. 그 사실은 좌우대칭적 구조나 수직· 수평을 정확하게 맞춘 표현방식과 건물을 마치 정물처럼 보이게끔 촬영한 형식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작업에서 감도는 분위기는 시각적 조형성보다 감성적인 부분을 더 세심하게 다루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감성적인 부분은 ‘전이(轉移)의 내력(來歷)’에서 ‘투시(透視)의 강도(強度)’로 작업의 시점이 변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문희는 이번 작업에서 “조형적인 부분보다는 ‘사람이 그 안에 산다’는 것, 그것의 지금 모습”을 먼저 생각했다(인터뷰). 이전 작업에서는 신도시나 기획단지가 지닌 함의, 다시 말해서 창고와 멀티플렉스, 대형쇼핑몰, 타운하우스 등 이 대도시 외곽에 형성된 배경, 바로 현대도시 시스템의 ‘전이’ 과정을 정적인 이미지로 보여줌으로써 전이의 ‘내력’을 시각화하는 측면이 강했다.—물론 이번 작업에서도 이런 특성이 존재한다. <Townhouse 2020> 연작은 이 시기 타운하우스의 외적 ·내적 성격을 기록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제목에 연도를 넣었다. 이것은 그가 (전이의 내력은 아니더라도) 변화의 ‘내력’(변천과정)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려준다.—하지만 ‘타운하우스의 감성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번 작업에서는 타운하우스를 ‘투시’하여 그 ‘강도’에 따라 그곳이 지닌 내적감성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상황, 감정 등을 작업의 전체분위기로 끌어온다. 다시말해서 현대 도시시스템의 ‘전이내력’ 보다는 타운하우스라는 특정대상의 감정적 ‘투시강도’가 작업의 주요 형성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타운하우스의 쾌적함이 얼마나 오래갈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인터뷰). 서구(특히미국)의 라이프 스타일—낮에는 과밀한 도시에서 일하고, 도시외곽의 쾌적한 집으로 퇴근하는 삶—을 동경하며 지어진 타운하우스는 어쩌면 영화세트이거나 연극무대에 불가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와 서구의 사회환경은 다르다. 우리나라는 대도시 밀집생활 시스템이며, 그로인해 그 밀집 속에서도 사생활보호가 잘 될 수 있는 아파트나 다세대주택 등과 같은 한국적인 건축형태가 등장했다. 개인 주택마저도 이러한 국내의 사회적 환경에 따라 여러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조문희의 출발점은 여기다. 서구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동경이 타운하우스라는 환영적 공간을 우리나라로 이식시켰지만, 그곳에 국내의 사회적 환경이 투영되면서 그 곳은 철옹성 같은 닫힌 공간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윤증대와 정서적 차원을 위해 밀집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사생활 침해의 문제를 불러오고, 결국 자유로움 과쾌적함을 희생하는 상황으로 내몬다.—‘이윤증대’는 밀집도를 높여 더많은 건물을 짓고자 하는 건설사의 욕망이며, ‘정서적 차원’은 소속감 속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감정 때문에 동일한 형태(건물)를 찾게 되는 심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서구는 이웃간의 유대감이 느슨하게나마 존재(특히타운하우스)하는 반면, 한국은 급속도로 개인화 되어 이웃간의 유대감보다는 사생활 보호에 더 치중하고 있다.—여기서 자유로움과 폐쇄성이라는 타운하우스의 이율배반적 형상이 형성된다. 너무 가까이 있는 옆건물과 사생활 보호라는 이슈의 중첩은 창문수와 크기를 줄인, 혹은 창문을 커튼으로 가린, 극도로 폐쇄적인 형상으로 드러난다(<Sweet Home>연작, <Townhouse 2020>연작, <After snowy>). 특히 낮의 타운하우스 형상은 전혀 생기가 없어 더욱 폐쇄적으로 느껴진다.—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낮의 그곳에는 사람이 없다.—이런 ‘침묵’의 형상은 침묵의 기술로 인한 것이지 침묵이 현현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조문희가 타운하우스를 투시하는 가장 낮은 강도의 모습이다.
내면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순간
투시의 강도를 높이면 조금 다른 형상이 드러난다. 작가는 “건축물에 어떤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 순간은 건물의 외관이 아니라, 그 안을 투시했을 때 마주하게 된다. 먼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밤의 타운하우스를 들 수 있다. 이곳은 “밤이 되어서야 사람이 사는 느낌이 난다.”(인터뷰) 땅거미가 지면서 어둑해지면 커튼이 드리워진 창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커튼에 어른거리는 어떤 실루엣을 통해서 “누군가 있구나, 사람이 살고 있구나”를 확인하게 된다. 조문희는 “그때가 정말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차단된 상황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단순한 불빛이다. 그래서 어떤 공허함을 느끼게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정서가 있다.”(인터뷰)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시간에 찍은<Sweet Home>과 밤의 타운하우스 정경을 찍은<Townhouse 2020>에 이러한 정서가 풍긴다. 견고하게 내부를 숨기고 있는 타운하우스 건물은 어스름한 시간이 되어서야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며 부드러운 속살을 보여준다. 조문희는 이 순간을 “건축물의 [진정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타운하우스의 동경이 내부를 따뜻하게 데우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균일화, 균등화 되었던 건축물의 이미지는 그곳에 각자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 건축물마다 각각 다른 삶의 이야기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표백되고 휘발되었던 삶의 내용은 밤이 되면 다시 건축물에 깃든다. 이로써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번 작업은 이전과는 다른 내러티브(Narrative)의 잠재태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서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전 작업도 서사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이번 작업인 낮의 타운하우스와 밤(혹은 일몰후 오후)의 타운하우스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낮의 타운하우스는 마치 ‘사건현장’을 연상시킨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공간, 혹은 일어났던 공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풍경은 이전 작업에서 줄곧 보여줬던 이미지다. 어떤 특정 주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뭔가 일어날/났던 분위기, ‘사건현장’으로서 ‘주체없는 서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밤의 타운하우스는 다르다. ‘사건현장’이 아닌, 특정 주체가 존재하는 ‘삶의 현장’에 관한 잠재된 이야기를 지닌다. ‘주체있는 서사성’이다. 결국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 ‘사건현장’으로서의 서사성을 잔상으로 지닌채로(낮의 타운하우스), ‘삶의 현장’으로서의 서사성으로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밤의타운하우스). 그렇다고 ‘사건현장’에서 ‘삶의 현장’으로의 전진이 선적 위상에서 전후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현장’과 ‘삶의 현장’은 전혀 다른 현장이며, 전혀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 ‘사건현장’으로서 타운하우스는 차가운 폐쇄성을 드러내지만, ‘삶의 현장’으로서 타운하우스는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둘은 전혀 다르다. 조문희는 지금 타운하우스를 감성적으로 접근하면서 그 민 낯을 한꺼풀씩 벗기고 있다.
커튼 밖에서 머뭇거리던 작가의 투시강도는 이윽고 건축물 내부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번 작업에서 물리적으로 투시의 강도가 가장 강한 형상이다. 그 형상은<two chairs in room>, <Sunset>로 드러난다. 건물의 내부를 드러냄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감성을 끌어내는 작업이다.—<Sleepless>의 경우는 빛의 반사에 의해 내부가 보일 듯 말 듯 한다는 측면에서 밤의 타운하우스와 창을 통해 건물 내부가 드러내는 작업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이 작업들은 사람이 있었던 흔적(<two chairs in room>)이나 입주하게 될 공간(<Sunset>), 즉 사람이 직접적으로 살을 비비게 될 공간을 드러냄으로써 감성을 고조시키고, 서사성을 증폭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는 그 시간이 낮이라는 사실이다. 같은 시간대에 투시강도의 차이는 ‘사건현장’이었던 낮의 타운하우스가 ‘삶의 현장’으로 변모시킨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작가는 건물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건물 전체를 관망하던 그가 창에 집중하며 건물에 가까이 접근했다. 멀리서 보이지 않던 것도 가까이에 가면 보인다. 대상과의 거리는 친밀도와 반비례한다. 조문희는 건물에 가까이 다가섬으로써 낮의 타운하우스가 보여줬던 ‘침묵’의 기술을 와해하고, 침묵의 형상(건물)이 내뱉는 복화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순간은 무척 짧다. 언제 그 창에 커튼이 드리워질지 모른다.
“늘 궁금하다. 그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찰나의 순간에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게 아름답다. … 민 낯이 드러나는 그 순간.”(인터뷰) 조문희는 찰나에 드러나는 내부가 건축물의 민낯이라고 생각한다. 건축물의 본모습이라고 보는 것이다. 작가는 겹겹이 존재하는 타운하우스의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타운하우스가 지닌 다층적 의미를 드러낸다. 한국적 타운하우스의 폐쇄성, 그 안에 스며있는 삶의 온기, 건축물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순간 등이 모든 것이 타운하우스 의자화상이다. 서구적 삶의 꿈을 파는 영화세트와 같던, 연극무대와 별반 다르지 않던 타운하우스는 그 안에 사람이 산다는 사실로 인해 납작한 세트장에서 충만한 삶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이제 조형성의 안쪽에서 감성적 언어로 쓰인 다층적이고 잠재적인 타운하우스의 이야기는 읽을 시간이다.
속도의 잔상이 빚어낸 텅 빈 풍경
황정인(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미팅룸 편집장)
어디선가 봤음직한 정체모를 건물이 평평한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창문도 없고, 간판도 없는 건물은 흡사 컴퓨터 게임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처럼 인공적인 색채와 형태를 지녔을 뿐이다. 일상 속에서 도시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그러한 경험에 의해 드러나는 대상의 실체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우선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공간은 분명 특정한 장소에 실존하는 공간이다. 이것이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과 만나면 견고한 색면과 단 단한 형태에 세월의 흔적과 인적마저 감춘 무장소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그가 장소를 경험하는 방식에서 찾 을 수 있다. 작가는 매일 같은 경로로 작업실과 집을 오가는데, 이 때 운전을 하면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광 속에 유독 그것의 형 태와 색채로 눈길을 끄는 공간들이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잔상처럼, 각각의 건물은 작가의 기억 속에 특정 한 색과 형태로 단순화되어 감각적 표식으로 재탄생 한다.
작업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공간이 이름 모를 하나의 보편적 공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에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 첫 번째로 반복된 일상의 경험이다. 작가노트에서처럼, 그의 작업은 규칙적인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도시의 풍광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 작한다. 작가는 거주지와 작업실, 그리고 온갖 사회적 관계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의 도심을 매일 같이 차로 오가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접하게 되는 주변 풍경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특히 고속도로를 오가며 도로의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건물들의 행 렬이나 도심 외곽의 거대한 물류창고, 임의적으로 세워진 가건물 등이 그 대상이 된다.
두 번째로 작가는 이러한 스펙터클한 풍경을 관찰할 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대개 그가 작품의 소재로 삼는 대상은 거대한 인공 구조물로 이뤄진 건축적 공간이다. 작가는 고속도로 위에 펼쳐진 자연풍광 속에 이질적인 양감을 지닌 덩어리처럼 들어서 있는 인공 의 건물을 원거리에서 감지한 일종의 시각정보로 인지한다. 그 중에서 늘 궁금증을 자아냈던 대상을 작업의 피사체로 삼고, 이를 실제 로 방문하여 건물의 외관을 다시 스캔하듯 렌즈에 담는다. 물론 이 때도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는 법은 없고, 그것이 자연과 대비되는 이질적인 요소로 인식됐던 요소들의 주변을 맴도는 관찰자로서의 거리는 유지된다.
다음으로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표현어법으로 자리한 비워내기 혹은 지워내기의 방식이다. 그는 사진 혹은 영상 속에 담긴 건물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단순화하거나, 아예 백색의 빈 공간으로 오려내듯 지워낸다. 시간의 흔적이나 건물의 명칭, 기능을 가리키는 텍 스트 정보나 각종 표식, 건물의 내외부의 모습이 반영하는 창문은 생략 혹은 삭제의 대상이 된다. 때로는 건물의 외곽만 알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만이 하얀 여백과 함께 채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생략과 삭제의 방식은 대상을 하나의 조형적 요소로 인식하게끔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이 과정을 거쳐 탄생한 건축적 공간은 그 의미나 기능이 희석된 채, 껍질 같은 표면과 윤곽의 모습으로 화면의 정 중앙에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일상의 공간을 스쳐 지나는 속도가 작품의 주요소를 이룬다. 그의 작업에서 대상은 속도가 만들어낸 잔상들이 견고한 색 채와 형태 안에 머문 결과이기도 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한 도로의 풍광 속에서 작가의 눈길을 끄는 커다란 인공의 구조물은 결코 그것의 세밀한 정보는 드러내지 않는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상대 속도에 의해 주변 풍경은 물리적인 좌표를 실시간으로 옮겨간 다. 단지 그것을 사물, 혹은 대상으로 인지시키는 부피감이나 색채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 하나의 중요한 시각적 정보가 되어 망막의 표면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뿐이다. 이렇게 속도에 의해 잔상으로 남은 시지각적 정보는 작가의 기억 속에 누적되 어 구체적인 정보가 사라진 또 하나의 낯선 풍경을 만든다. 즉,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의 속도에 의해 잔상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이미 지가 그의 기억 속에 반복, 중첩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허한 구조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물은 지어지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 도시 속 건축 생태 안에서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색과 형의 피상적 정보만이 존재하는 비현실적 분위기의 텅 빈 표면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이끈다.
그녀의 작품에서 이러한 요인들은 사진의 표면 위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반복된 일상에서 관찰되는 도시의 풍경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공간을 담은 또 다른 풍경(Another Landscape)으로 탈바꿈시킨다. 공간을 지각하는 일은 그것을 감각적으로 인지 하는 개인의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할 때, 조문희의 작품에 나타난 인공적 풍경은 무한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대상의 표면 아래에서 결코 모습을 드러나지 않은 대상의 본질을 경험한 것에서 비롯되며, 나아가 이것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지각하는 오늘 날의 시지각적 사고의 한 양태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