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한 Kwanghan, Kim
Artist Biography
아름다움 너머의 슬픔 : 김광한의 지독한 그리기
글/ 박준헌(미술이론)
삶은 가혹하거나 덜 가혹하거나 둘 중 하나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 가혹함을 견디는 것이 삶이다. 삶은 잔인하거나 덜 잔인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 잔인함을 견디는 것이 삶이다. 삶이 행복과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졌다면 우리에게 예술은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삶은 가혹하고 잔인하기에 우리는 예술을 통해 삶을 위안할 수 있고 그 고통을 마주할 수 있다. 인간이 삶에 대해 노래하고, 그리고, 쓰는 이유다.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 경험이라면 예술의 유일한 바탕은 잔인하고 가혹한 삶에 대한 연민이자 사랑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들 눈에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는 부박한 것들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가의 시선이고 출발이며, 여기서 얻어지며 우리가 보는 모든 작품은 결국 삶 속에서 얻어진 어떤 흉터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향기가득」이라 명명되어진 김광한의 작품 역시 그의 삶 속에서 마주한 어떤 상처이며, 나아가 삶을 산출하는 좌표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지식이 아닌 몸으로 체득된 사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허무하고 거창한 담론으로 점철된 화면이 아닌 자신의 노동으로, 몸으로 아주 조금씩 그리고 또 그려서 완성되어진 화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농부가 땅을 대하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을 본다. 농부가 땅을, 농사를 아름답고 친숙함으로 대해서는 절대 농부가 될 수 없듯이 그 또한 대상을 친숙함으로 화면을 흥미로 다루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면을 경작하는 농부와도 같다. 비록 그 결과가 우리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쌀과 곡식이 아닐지라도. 예술가의 숙명이다.
그의 작품에는 고도의 노동력이 집약되어 있고, 그 안에는 어떤 절박함이 존재한다. ‘절박함’이라고 하면 추상적일 수 있겠지만 그 단어 속에는 삶 속에 본래 내재해 있는 생존과 그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야만 하는 우리들, 혹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물론 그의 지독한 그리기에는 그 생존을 위한 경건함을 동반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극한에 직면해 본 자의 정서 같은 것이 베어 있다. 그것은 매끄러운 삶의 표면을 부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진실이며, 그 진실들에 외경심을 가진 이 만이 말할 수 있는 절박함이다. 그래서 슬프다.
김광한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아름답고 탐스런 그림 너머의 세계, 작품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세계, 그리고 나아가 그 작품을 통해 그가 다가서려는 세계는 바로 생존에 대한 절박함과 그 진실들에 대한 생생함이 공존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 세계가 비록 실재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매개로 한 화면 안에서의 예술적 개념(槪念)이라 할지라도 그는 ‘삶에 대한 경건함’을 예술적 유희가 아닌 노동의 극단으로 내 몸을 밀어 붙여 증명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더욱 슬프다.
그는 작품에서 주로 모과, 석류, 대추 등 과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과일들은 그의 미감에 의한 재배치와 표현을 통해 시리도록 화려하고, 형언할 수 없는 청량감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혹자는 이러한 그의 그리기 방식을 극사실이니 혹은 하이퍼리얼이니 하는 어떤 하나의 틀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이러한 기법이나 이미 존재했던 하나의 형식으로 바라 본다면 극히 협소한 해석이다. 그는 실재(實在)하는 과일을 미술이라는 예술적 형식을 통해 재현하기 보다는 이러한 과일들을 통해 인간의 눈이, 회화가 가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완벽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보고자 하며, 그것이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일까를 되묻는다. 놀라운 집중과 우직한 그리기를 통해서. 아무튼 그의 회화적 실험을 무어라 부르고 정의 내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의 인식되고 있는 극사실 경향의 회화 작품들을 넘어서는 성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다시 한번 주지할 것은 표면이 아니고 이면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표면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면에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 의미이다. 그 의미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할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우리는 현실을 자각하고 인식하는 매커니즘에서 어떤 근본적인 지각변동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는 동일한 풍경이나 회화에도 불구하고 세대에 따라 인지하는 상상의 층위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마찬가지로 한 작가의 작업에 대해 같은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작품에서 동일한 세계와 의미를 볼 수는 없다. 특히, 김광한처럼 세월의 변천에 따라 그 의미나 자격이 상실되어 버린 대상을 다루는 작가일 경우 그런 반응은 더욱더 확연하다. 즉, 농경사회의 기억을 가진 세대가 바라보는 김광한의 작품과 산업화 되고 현대화된 기억을 가진 세대가 바라보는 김광한의 작품에는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그의 작품은 그 사이 어디쯤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것은 크게는 실재와 이미지의 차이일 수도 있으며, 작게는 그것을 기억하고 싶은 세대와 망각하고 싶은 세대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그 차이를 등가로 규정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양자의 세대가 김광한의 작품이 갖고 있는 삶의 근원을 되돌아보는 행위, 흔히 진정성이라 불리는 존재의 어떤 중심으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노력과 실천, 그리고 열망의 매개물로서 그의 작품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현대사회에서 예술 역시 개량화와 표준화의 숙명을 비켜갈 순 없겠지만, 우리의 의식과 감정 역시 획일화를 피해갈 순 없겠지만, 세상이 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하기 위해서는 그 내면의 생산자들은 더욱 고통을 감내하고 희생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유를 구속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유행과 트렌드를 쫓기 보다는 자신의 삶과 상처를 드러내 서로를 치유하고, 희미한 기억일지라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김광한의 노동의 붓질이 있기에 나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그 자리에서 새 살이 돋고 다시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